고백으로 시작하자면 저는 최동훈 감독의 열렬한 팬입니다. 충무로에서 최동훈 감독만큼 순수하게 영화의 재미로 관객들을 스크린 앞에 앉힐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당연히 문제의 '그' 영화를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외계+인>시리즈는 누가 봐도 최동훈 감독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저 또한 1, 2편을 모두 영화관에서 봤지만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 90점만 받던 학생이 한 번 50점을 받았다고 해서 50점짜리 학생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최동훈 감독이 여전히 90점짜리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동훈 감독이 더 놀라운 건 50점부터 올라와서 90점짜리 감독이 된 게 아니라 데뷔작부터 90점짜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색인레터 1편의 주인공이었던 천하의 봉준호 감독도 데뷔작에서는 역대급 실패를 맛봤는데 최동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은 지금까지도 한국 케이퍼 무비를 대표하는 수작으로 회자됩니다. 지금은 그렇게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있지만 2004년 당시에 210만이라는 꽤 준수한 관객 수도 이를 증명합니다. 이 영화에는 최동훈 감독이 원래부터 잘했고 꾸준히 잘했던 것 세 가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가 막힌 각본 능력입니다. 저는 최동훈만큼 말맛을 살릴 줄 아는 각본가는 몇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어는 조금만 대본이 어색해도 말맛이 죽습니다. 대본으로 읽으면 문제가 없는데 입으로 뱉으면 늬앙스가 전혀 다르죠. 최동훈의 영화들은 배우와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을 때 스크린과 관객석의 거리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고받는 말의 온도와 높이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머지 대사 같지가 않은 겁니다. 그런데 박신양을 필두로 염정아, 백윤식, 이문식이 또 맛있게 대사들을 씹어버리니 영화가 재미없을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다수의 캐릭터를 직조하고 버무리는 능력입니다. 저는 충무로에서 '캐릭터버스터'를 최동훈 감독만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타짜>, <도둑들>같은 영화들에서 최동훈 감독이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보면 혀를 내두를 지경이죠. 그리고 이 능력은 <범죄의 재구성>에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대사도 많은 영화인데 누구 하나 겉돌지 않고 든든합니다. 영화가 흐를수록 크기는 다를지언정 기둥처럼 각자가 서있어야 할 자리에 땅을 파고 서있는 캐릭터들을 보고 있으면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지금이야 최동훈 감독이 이걸 여러 번 해냈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이 영화만 놓고 보면 이건 그냥 타고난 능력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재미있게 연출하는 능력입니다. 이게 뭔 당연한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영화를 재미있게 연출하는 건 정말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래픽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유명 배우가 대거 출연해도 노잼인 영화는 수두룩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영화가 감독의 작품인 이유는 모든 요소를 종합해서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게 감독의 역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동훈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을 정말 재미있게 만들었습니다. 전반적인 서사도 너무 좋지만 대사면 대사, 액션이면 액션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습니다. <범죄의 재구성>을 보는 116분이 인생에서 가장 알차게 재미있는 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요.
결론적으로 <범죄의 재구성>은 최동훈 감독이 원래 잘하던 것들이 한가득 들어있는 영화입니다. 장르를 떠나서 누군가가 정말 '재미있는' 영화 한 편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제 리스트에 <범죄의 재구성>은 분명히 들어가 있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