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쟁영화를 좋아합니다. 정확히는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전쟁영화야말로 치열한 미술팀의 작업을 필요로 하고 또 그 작업이 빛을 발하는 영화 장르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저에게 1998년 개봉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2001년 출시된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아직까지도 최고의 전쟁 영화와 드라마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국내판 DVD 리미티드 에디션을 소장하고 있을 만큼 좋아하는 드라마인데요. 이 두 작품을 보면서 느낀 경이로움을 한국영화에서 느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날 때까지는요.
영화관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것은 벌써 20년쯤 지난 일이라 그때의 감정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가지만큼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어요. 영화의 완성도나 서사의 완결성을 떠나서 전투 장면의 연출이나 복장, 소품, 심지어 배경까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제작비는 148억 원으로 지금 기준으로도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작비를 제대로 쓴다는 것은 <태극기 휘날리며>같은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개봉한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 영화가 보여준 수준의 스케일과 디테일에 도달한 충무로의 전쟁영화는 없습니다. 영화에 사용된 시체 모형 한구에 천만 원 정도가 쓰였고 영화에 등장하는 탱크를 CG 처리하지 않기 위해 불도저를 개량해서 직접 만들정도였다고 하니 장면 장면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더불어 전쟁영화라면 빠지기 어려운 고어하고 잔인한 장면들도 수준 높게 표현되었고 생각보다 등장하는 횟수도 많아 이 영화가 15세 이상 관람가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죠.
그렇다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심지어 전쟁영화는 호불호가 꽤 갈리는 장르영화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충무로에 한 획을 그은 영화, 그중에서도 하나의 장르에서 한국영화를 한걸음 진일보하게 만든 영화 중 한편으로 <태극기 휘날리며>가 매우 당당하고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두 번이나 재개봉했던 이력이 있지만 혹시 언젠가 한 번 더 재개봉한다면 꼭 영화관에서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